어제는 나의 유년 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은사님을 뵈었다.
그분께 대학원 진학 의지를 밝혔고, 왜 대학원을 생각하는지, 가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앞으로의 로드맵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제의 대화를 되새길 겸, 이번 주 글을 통해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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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대학원에 가려고 하지?"
내가 대학원에 가려는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와 이상적인 이유, 두 가지가 공존한다.
먼저 이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상: '미쳐있음'이 허락된 공간

은사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 가장 낭만적이고 뇌리에 깊게 박힌 것이 하나 있다.
"왜 프랑스 예술가들이 술집에 모였는지 아니? 그곳에서는 모두가 미쳐있기 때문이야."
무언가에 미쳐있다는 건 때로는 외로운 일이다.
우리는 종종 사회적 시선이나 현실적 제약 때문에 스스로 한계선을 긋곤 한다. "적당히 하자, 튀지 말자" 하면서.
하지만 그 미쳐있는 이들이 한 곳에 모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혼자만의 외로움은 뜨거운 연대감으로 바뀌고, 서로가 서로의 한계를 지워주며 폭발적인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어린 시절 내게 영재원이 그런 곳이었다면, 이제는 대학원이 바로 그 '미쳐있음'이 온전히 허락되는 공간이라 생각된다. 직장에서 100%의 자아실현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위 이미지 속 두 번째 그림을 이번 썸네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빈센트 반고흐가 1887년 파리의 한 카페에서 그린 <Café Table with Absinthe>이다. 그가 해바라기가 아닌 것을 단독 정물화로 그렸을 만큼 그에게 압생트는 단순히 마시는 술의 개념을 넘어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현실: ⸢ 영역 전개 ⸥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주술회전에 나오는 술식 ⸢영역 전개⸥를 이미지로 사용하였지만, 이건 결코 가벼운 내용은 아니다. 이건 내 커리어 확장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20살 때 '콘셉트 아티스트'를 꿈꾸며 국민대 조형대학 영상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학교 타이틀은 물론 감사하다. 하지만 취업 시장에서 내가 촬영, 편집, VFX 전문가로 나설 게 아니라면, 이 전공은 타 분야를 지망하는 나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다고 영상인으로서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다.
나는 주로 아날로그 방식이 결합된 모션을 제작하였는데, 결이 잘 맞는다고 판단하셨는지 학부 은사님을 통해 2년 연속 광화문 미디어 아트 제작을 맡게 되었고, 이는 학부생으로서 큰 영광이었다.
그런데 문득 광화문 앞에 선 나는 생각했다.
"정말 감사하고 뿌듯하지만, 평생 업으로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학교 밖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창업을 해보고, 또 회사에 들어가 AI 활용 실무를 뛰어보니 확신이 생겼다.
"아, 나는 HCI가 하고 싶은 사람이구나."
26살, 늦었을지 몰라도 명확한 결론이었다.
물론 시장은 냉정하다. UX 분야에서 영상 전공자와 산업디자인 전공자 중 누굴 더 선호할까?
당연히 방법론적 기본기가 탄탄한 후자일 것이다.
분골쇄신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겠지만, 원론이 중요한 분야일수록 전공이라는 간판을 이기긴 쉽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 가슴이 뛰는 곳은 HCI인 것을.
그렇기에 나는 전공 분야의 확장, 그리고 내 전문성을 증명해 줄 '공학석사' 타이틀이 필요하다.
"나는 왜 HCI라는 단어에 가슴이 뛰지?"
돌이켜보면 이 강렬한 열망은 채우지 못한 '갈증'에서 비롯되었다.
학부 시절, 강의실에서는 늘 거장의 영화가 틀어졌다. "이 장면에서는 이런 앵글을 써야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기술은 배웠지만, 나는 그 기저의 인과가 더 궁금했다. "왜 사람들은 특정 시각 자극에 반응하나?" "영상미 너머 심리적 장치는 뭘까?"
이 호기심은 내가 단방향 매체인 영화보다 상호작용이 가능한 앱 서비스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AI 시대가 오면서 질문은 더 고도화되었다. "인공지능과 인간은 어떻게 상호작용해야 하며, 이를 유익한 서비스로 만들기 위해선 무엇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나는 무엇을 연구하고 싶지?"에서 오는 딜레마
이 질문 앞에 설 때마다 내 안의 두 자아가 충돌한다.
나는 그리 이타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내 가슴은 '돈이 안 돼서 소외된 집단'을 향한다.
하지만 머리는 "정신 차리라"라고 소리친다.
창업과 직장 생활을 통해 시장 파이가 작으면 투자도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뼈저리게 겪었으니까.
실패에서 얻은 배움. 두 서비스는 무엇이 다르지?
작년 6월, 창업활동을 이어가던 당시 나는 개발 팀원들과 함께 생성형 AI를 활용해 곤충 이미지를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변환해 주는 워크플로우를 국내 생태원에 보급하는 서비스를 기획하여 지자체에 제안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광탈이었다.
반면, 현재 내가 재직 중인 넥슨에서는 AI를 활용해 자신의 메이플 캐릭터를 일러스트로 바꿔주는 서비스를 출시했고, 이는 꽤나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둘은 기술적으로는 거의 동일하고 또 있으면 좋은 서비스이지, 필수적인 것까지는 아니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만 차이는 '맥락'이다.
| 비교 | 곤충 생태원 AI 일러스트 변환 서비스 | 메이플스토리 AI 일러스트 변환 서비스 |
| User Retention | △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하면 기념용으로 한 번은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이용하겠지만, 일회성으로 그칠 확률이 높음) |
⭕ (애초에 해당 게임에 대한 애정이 높은 유저들 위주로 이용하는 서비스 + 하나의 계정 속 다수 캐릭터 존재) |
| Virality | △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기관에서 아카이빙하여 홍보용으로 쓰던가, 혹은 아이의 부모가 SNS에 올리는 등 소비 대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음) |
⭕ (인정욕구가 강한 유저들이 SNS등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자신의 캐릭터 일러스트를 공유, 또는 게임 유튜버가 해당 서비스 업데이트 소식을 채널에 공유→게임 수명 연장 효과) |
고로 사용자의 재방문 동기와 자발적 확산 심리를 설계하는 UX 연구가 필요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듀오링고]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언어 학습은 포기율 90%의 '노잼 시장'이었으나, 듀오링고는 현재 전 세계 1위 교육 앱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 탄생 배경이다.
듀오링고는 웹 상의 모든 언어를 번역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인터넷의 대부분 콘텐츠가 영어로 되어 있고, 또 당시(2010년)만 하더라도 이중 언어 구사자가 부족하여 비영어권 사람들은 그런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전문 번역가는 너무 비싸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루이스 폰 안과 그의 박사과정 제자인 세베린 해커(실제 성이 해커임)는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사람들에게 무료로 언어를 가르쳐주는 대신, 그들이 연습 문제로 푸는 문장들이 실제 번역이 필요한 웹 문서가 되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러나 해당 서비스를 론칭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몇 가지 한계점이 드러났다.
번역 품질이 기대만큼 안정적이지 않았고, 규모가 커지면서 실시간 번역 수요를 맞추기 어려웠으며, 무엇보다 스마트폰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래서 2014년 무렵부터 크라우드소싱 번역을 점차 접기 시작하고, 지금과 같이 중독성 강한 언어 학습 앱으로 전환하였다.
이 사례가 내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듀오링고는 처음에는 영어문화권 밖의 소외된 집단을 위한 웹 번역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미션을 꿈꿨지만,
현실의 한계를 직시하고 게이미피케이션(보상/경쟁) 어플로 피벗 했다.
그 결과, 언어 학습이라는 ‘노잼 시장’을 전 세계인이 매일 찾는 습관으로 바꿔놓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사회적 미션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다.
듀오링고에서 서비스하는 언어를 잘 살펴보면, 하와이어와 같은 소수민족 언어까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외된 가치와 시장성,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듀오링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연구의 종착지가 아닐까?
로드맵 그리기
그렇다면 이제는 방향을 정했으니, 구체적인 로드맵을 그릴 때다.
최근 며칠간 논문을 디깅 하면서, '소외된(외면받는) 영역'에 '리텐션(지속성)'을 불어넣는 연구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먼저 내 '가슴'을 뛰게 한 곳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의 [DESIGN & INTELLIGENCE LAB]이었다.
이곳의 최신 논문인 <IPTV 사용자 회피-복귀 분석>은 모바일 OTT의 대중화로 일상에서 외면받는 IPTV를 바보상자가 아닌 "회복의 매체"로 재정의하는 인문학적 따뜻함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청각장애인의 그룹 대화 경험 향상을 위한 AR 말풍선 연구>는 실제 상용성이 떨어져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시장성이 불확실한 실험임에도 그 도전과 가능성을 지지해 준다는 점에서 연구에 대한 마인드가 열려있는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편, 내 '머리'를 차갑게 식혀준 곳은 KAIST 산업디자인학과의 한 랩실이었다.
designize
research themes / areas Traditionally, design management is defined as "managing design". However, design has evolved from product design to experiences & services to design thinking and design methods. Through this evolution, the transformation of busine
www.designizelab.com
수많은 랩실 중에서도 유독 이곳이 눈에 밟힌 이유는 명확하다.
이곳은 디자인 경영 전략을 통해 비즈니스 모델을 혁신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연세대는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인가'를, KAIST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그리고 어디가 되었든 내 목표는 동일하다.
*썸네일 출처: https://www.vangoghmuseum.nl/en/collection/s0186V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