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레딧에서 AI 커뮤니티 동향을 살펴보던 중 우연히 한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요와 댓글도 거의 없는 묻힌 글이었음에도 나는 그 제목을 보자마자 마치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상상 속 친구
내가 나이를 먹은 걸까, 아니면 사회라는 것에 조금은 닳아버린 걸까.
‘상상 속 친구’라는 말이 이제는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분명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을 텐데, 그 얼굴조차 또렷이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잊고 살아왔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언젠가부터 나는 상상이라는 것을 잘하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MBTI가 'ISTJ'로 굳어진 뒤로는 더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은 현실을 조금 앞서가는 계획이 아니라, 아무런 제약도 없는 자유로운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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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 눈에는 마쿠로쿠로스케가 보일까?
'동심'이라는 단어를 대표하는 애니메이션에는 픽사의 '토이스토리', '몬스터주식회사' 등도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동양권 정서에 초점을 맞추자면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이 먼저 떠오른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에서 우리는 '동심'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목격할 수 있다.
영화 초반부, 메이네 가족이 이사 온 집에서 아이들이 '마쿠로쿠로스케(먼지 요정)'을 처음 발견하였을 때, 이웃집 칸타의 할머니 대사가 유독 인상 깊다.

"아, 마쿠로쿠로스케구나. 그래, 너희들한테도 보이는 모양이구나."
"나도 아주 어렸을 때는 보였단다. 하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지."
분명 나도 어린 시절에는 그러한 존재들을 보았다.
그런데 과연 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은 어떨까?
Will AI Kill Imaginary Friends? | Essay | Zócalo Public Square
Will we someday have nostalgia for a time when children talked to an imaginary friend instead of an AI companion? We don’t think so. With the rise of
www.zocalopublicsquare.org
레딧에서 우연히 발견한 에세이를 통해 AI와 아이들 정서 발달의 관계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참고로 해당 에세이는 오리건 주립 대학교 연구 디렉터, Naomi R Aguiar 박사 주도로 작성되었으며, 그녀는 아이들이 AI 챗봇과 맺는 관계와 그 영향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Will AI Kill Imaginary Friends?
생성형 AI가 부상함에 따라, 회사들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AI Companion(이하 동반자) 서비스 및 제품을 쏟아내고 있다고 한다.
겉으로는 AI 동반자도 기존 '상상 속 친구'와 마찬가지로 고도로 개인화되어 있으며 실제 현실 속에서 아이의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AI 동반자는 제작사의 훈련 데이터, 그리고 특정 가치관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위 에세이에서 작성자는 일련의 연구를 통해 아이들이 AI 동반자를 매력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하되, 좀 더 깊은 친구 관계로는 무생물 장난감을 선호한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 핵심은 바로 '창의력 통제'에 있다고 한다.
AI 동반자와의 의사소통은 그 상호작용의 흐름을 따르도록 만드는 반면, 상상 속 친구와 함께라면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방식으로 온갖 종류의 생각과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혼자서 하는 역할놀이는 창의적 발상을 더 많이 하게 하며, 관점 수용 능력을 향상하는 등 더 다양한 이점이 있다.
물론 아이들이 하는 상상에는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
아이들은 역할 놀이를 할 때 폭력, 죽음 등을 상상하기도 한다.
상상 속 친구는 실제로 이를 더 부추기거나 합리화시켜주지는 않는다. (조현병 등 병리적인 망상은 예외로 두기로 한다.)
그러나 AI 동반자는 장시간 사용 시 필터링 등 일부 안전 기능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기에, 아이에게 부적절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등의 위험이 존재한다. 더 나아가 AI 동반자의 말은 '외부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아이의 위험 행위를 합리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그러니 아무리 시대가 발전했어도, 우리는 상상 속 친구가 지닌 효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작성자의 최종 결론이다.
상상 속 친구가 수동적이어야 내가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토토로 속에 등장하는 모든 정령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수동성', 그리고 '침묵'이다.
만약 토토로가 사츠키와 메이 자매에게 먼저 말을 걸며 접근하였다면, 그 신비로움은 급감되었을 것 같지 않은가?
메이가 작은 토로로를 쫓다가 숲 속에서 거대한 토토로를 처음 발견한 것도, 작은 토토로들이 뭔가를 해줬기 때문이 아니라 "저게 대체 뭐지?"라는 근원적 호기심 때문이다. 고로 상대가 수동적이기에 본인이 능동적으로 움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정령들은 말을 하지 않기에, 자매는 그들의 행동에 자신들만의 의미를 부여한다.
과거 하야오 감독의 유명한 지브리 애니메이터 면접 일화처럼 실제로 토토로는 그저 배가 고프지 않아 자매를 잡아먹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당시 면접을 봤던 애니메이터가 토토로는 송곳니가 없기 때문에 채식만 할 것이라고 답했다고 하지만, 정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자매의 '순수함'과 아버지의 '존중'도 한 몫한다.
만약 사츠키와 메이 자매가 일찍이 현실에 눈 뜬 조숙한 아이들이었다면, 초반부에 마쿠로쿠로스케는 커녕 먼지 가득한 비위생적인 집을 보며 짜증부터 냈을 것이다.
또 만약 메이가 아버지에게 토토로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가 "메이는 아마 이 '숲의 주인'을 만난 거란다. 그건 아주 운이 좋은 일이야."라는 존중의 표현 대신 "안 그래도 피곤한데 내가 그런 헛소리까지 들어줘야겠니. 메이 네가 꿈을 꾼 거겠지."라고 말했다면 더 이상의 이야기 진행은 어려웠을 것이다.
AI 시대에 필요한 덕목
어쩌면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 우리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부모님께 여쭤보거나, 백과사전을 찾아보거나, 또는 지식인 등 커뮤니티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을 올리고는 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얻은 정보는 더 가치있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 듯한 느낌이다.
시간이 흘러 그것은 '구글링'이라는 형태로 진화하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특정 정보를 얻기 위한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다.
그러나 AI 시대에 접어들면서 과정이라는 것이 생략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AI에게 질문을 하면 이들은 즉각적으로 답변을 해준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지식은 늘어날지언정, 능동적인 해결 과정을 통해 얻은 지혜와는 그 값어치를 비교할 수 없다.
"이 시대에 AI를 적극적으로 쓰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낙오자 취급을 받는데 어떻게 하느냐."라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나는 AI 사용 방식에 따라 우리가 지혜까지 함께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상호작용의 대상이 수동적인 것이지, 나 자신은 능동적이어야 한다.
고로 AI가 내게 제시하는 답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만의 생각을 입혀나가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AI에게 내가 생각한 가설을 말하고, 그에 대한 반론을 요청한다.
그리고 AI가 내놓은 반론에서 내가 반박할 수 있는 부분은 전부 반박하며, 수용할 부분에서는 더 깊이 있는 리서치를 진행한다.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이러한 '비판적 사고'는 어렵다.
그러므로 정서 발달 과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AI 보다는 먼저 상상 속 친구를 만들어 자신의 내면세계를 강화시키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나가는 글
사실 상상 속 친구라는 것이 꼭 추상적이지만은 아니다.
애니메이션, 게임 속 캐릭터와 맺는 파라소셜 관계(PSR) 또한 비슷한 개념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고등학생일 때까지만 하더라도 투니버스에서는 이벤트 추첨으로 특정 캐릭터 성우가 시청자의 생일을 축하해주기도 하였다.
근데 여기서의 핵심은 '기다림의 미학' 같다.
사연이 담긴 편지를 쓰고, 방송국에 우편을 보내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TV 앞에 앉아 있는 모든 능동적 행위는 해당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페르소나를 학습한 AI가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설사 사연이 당첨되지 않더라도 그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한 층 더 성장한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다.
기다리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시간 속에서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법을 배운다.
AI는 이러한 과정을 생략한다.
요청에 즉각적으로 답하는 편리함은 우리가 스스로 상상하고 해석할 여지를 줄여버린다.
상상 속 친구가 지닌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썸네일 출처: https://www.zocalopublicsquare.org/will-ai-kill-imaginary-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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